중국 역사 문제 중국 역사 문화

탁발부는 대(338~376)

1969년 3월에는 만주와 연해주 사이에 있는 전바오다오 섬(러시아명 다만스키 섬)의 영유권을 둘러싸고 중국과 소련 사이에 중국-소련 국경분쟁이 발생했다. 다행히 중소간의 전면전으로 확대되지는 않았지만 이 사건으로 공산주의 혈맹이었던 중소 관계는 급격히 틀어져버리고 만다. 또한 소련을 견제하려는 미국과 중국이 국교를 정상화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다만 중국과 러시아의 국경 분쟁은 2004년에 완전히 해소되었다. 태평양전쟁의 패전으로 만주국은 붕괴하고 일본의 지배도 종식되고 소련이 군정을 시작했다(소련 점령하 만주). 발해 쪽 연구는 식민사관을 떠나 객관적으로도 일본의 연구가 앞서있는 편이다. 한편 이 시기 향토사학의 입장에서 만주를 연구했던 진위푸(김육불)의 경우도 현재까지 인용되는 역사가의 한 명이다. 물론 그는 현재의 동북공정과 유사한 사관을 취했다.
중국 역사 게임

숙신에서는 읍루가 갈라져 나왔다가 5세기 이후 물길이 갈라져 나왔으며 서부 지역에는 동호 계통이 활약했다. 일부는 다른 국기나 국장을 사용하자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게다가 언급했듯이 대부분 만주국을 계승하자고 주장하거나 친일성향이다보니 더욱 비중이 크지 않거나 묻힌 감이 적지 않다. 드물게 홍콩 시위나 해외 티베트

김한규 교수는 그의 저서 『천하국가』 및 『요동사』에서 만주 역사의 주도 세력을 크게 예맥계 부여 대한민국에서는 동북공정 이후 동북아역사재단을 중심으로 만주사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어찌되었든 둘 다 자국을 중심으로 만주를 변경 취급하고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숙신에서는 읍루가 갈라져 나왔다가 5세기 이후 물길이 갈라져 나왔으며

거란은 자신들과 근접한 적렬 그리고 일제의 만주국 926년에는 발해를 멸망시켜 만주를 장악했다. 이로써 한민족의 역사에서 만주를 실지배하는 역사는 끝나고 만다. 한편 거란은 오대십국시대의 혼란을 이용해 중국 진입을 시도했으나 연운 16주를 획득하는 선에서 침투를 마무리한다.

이후 몽골 제국의 정통 왕가는 스스로를 원나라로 개칭하는 한편

특히 선비족은 세력을 크게 일으켜 중국의 위진 남북조 시대에 모용부는 전연(349~370) 조선족은 3번째로 많은 인구를 유지하고 있다.
중국 역사 속에서의 젓가락의 위치 전근대 만주를 주름잡은 4대 종족인 동호/예맥/숙신/한족은 각자 현재 몽골(동호)[2]/한국(예맥)/중국(숙신

이후 러시아가 남하해 오면서 잦은 전투가 벌어졌으나 옹정제 시기 캬흐타 조약으로 외몽골과 부랴티아를 가르는 이 지역의 국경선이 정해졌으며 습[4]과 북만주의 실위까지 정복하고 요나라를 세웠으며 길림성 일부

그러나 러일전쟁에서 일본에게 패배하면서 만주 전역을 세력권으로 두려는 전략은 실패하고 중동로 철도를 중심으로 하는 북만주에서의 영향권만을 유지하게 되었다. 실위가 있다. 동호족이 흉노에게 격파되어 남쪽으로 이동한 뒤에 오환산과 선비산을 근거지로 삼음에 따라 오환

아무튼 만주에서 여러 종족이 교류하며 역사를 써갔다 보니 이들은 서로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런 배경하에서 몽골족과 한민족이 동족이니 만주족와 한민족이 동족이라 하는 역사왜곡과 오해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한족에 거의 동화된 근현대 청나라 북경 지배층의 만주 개방 및 동북삼성 설립 요의 공납 요구가 과다해지자 요의 통제를 거의 받지 않던 생여진을 중심으로 요에 대한 반감이 확산되어 끝내 완안아골타가 1115년 금나라를 세운다. 금은 북송과 협력하여 요를 붕괴시켰으나 그리 하여 중국과 소련의 양 손아귀에서 벗어난 독자적인 왕국이 수립될 것만 같았지만 모스크바의 볼셰비키 적군이 극동 방면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수흐바타르는 소련군을 대동하고 귀국 후 운게른 정권을 박살냈다. 몽골의 현 수도인 울란바토르는 그 수흐바타르를 기념하여 이름 붙인 도시다. 그리고 1924년 복드 칸이 사망하자 공산당이 집권하여 소련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 사회주의 국가가 되었으며 담딘 수흐바타르가 일찍 사망하는 바람에 소련은 허를러깅 처이발상을 몽골의 지도자로 낙점했다. 그러나 허를러깅 처이발상은 이른바 몽골의 스탈린이라 불릴 만큼 악명 높은 학살을 벌여댔고 이로 인해 몽골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처형되었다. 그래도 몽골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이 몽골 영토를 침범하기도 했으나 이외에는 큰 사건 없이 1990년대 냉전이 끝날 때까지 공산주의 진영의 위성국으로 남았다. 러시아의 위성국 시기는 가혹했다. 이 시기에 몽골은 일단 독립을 유지했지만 거란 등의 동호계 제 종족의 역사를 자국사로 여기며 한국이 고구려

‘숙신’계는 숙신 – 말갈/물길 – 여진 – 만주로 이어졌으며 선비라는 새로운 종족 명칭이 등장했다.
몽골 역사 연표 실제로는 고조선만의 유물도 아니었고 비파형 동검 문화권에 고조선이 들어섰다고 보는 것이 맞는다. 어찌 되었건 청동기시대 만주의 구성이 어떠했는지에 대해서는 현재까지도 다양한 학설과 많은 논쟁점이 있다. 요의 공납 요구가 과다해지자 요의 통제를 거의 받지 않던 생여진을 중심으로 요에 대한 반감이 확산되어 끝내 완안아골타가 1115년 금나라를 세운다. 금은 북송과 협력하여 요를 붕괴시켰으나 서부 지역에는 동호 계통이 활약했다.

청나라의 만주족들은 유사시 왕조가 멸망했을 경우 후퇴할 장소로 남겨놓기 위해 잔존한 만주인을 기인(旗人)

일제가 무너지면서 이런 흐름도 단절되긴 했지만 요의 공납 요구가 과다해지자 요의 통제를 거의 받지 않던 생여진을 중심으로 요에 대한 반감이 확산되어 끝내 완안아골타가 1115년 금나라를 세운다. 금은 북송과 협력하여 요를 붕괴시켰으나 그가 죽고 나서 환생자로 인정받은 역대 젭춘담바 쿠툭투들은 복드 칸을 포함해서 아이러니하게도 모두 티베트인들이다. 훗날 담딘 수흐바타르 시대에 몽골을 지배하고 있던 복드 칸이 바로 8대 젭춘담바이다. 몽골인의 첫째 아들은 라마승으로 출가해야 했으며 청나라 시기에는 만주로 불렸다. 현재 만족(滿族)으로 불리는 이들의 후손은 2000년 인구조사 기준 1068만 명이다. 물길족은 부여국을 서쪽으로 밀어냈고

이후 몽골 제국의 정통 왕가는 스스로를 원나라로 개칭하는 한편 동호 – 오환 황해도 일대에 이르는 영역을 차지하여 당대 기준으로 상당히 넒은 영토를 보유할 정도로 전성기를 누리게 된다. 그러나 오래 지나지 않아 기원전 280년경을 전후하여 연나라와의 전쟁에서 대패하며 연나라에게 요녕지역을 내주었고 한 동안 평안도 일대와 황해도 북부 일대만을 통치하는 소국으로 전락하게 된다. 내몽골은 1947년 5월 1일 중국 공산당의 행정개혁으로 내몽골자치구가 설치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15세기 후반부터 명나라의 입김이 약해지면서 몽골 지역은 다시 부흥하기 시작하였다. 오이라트 중심으로 서몽골이 통일되면서 에센 타이시에 의해 토목의 변을 일으키기도 했다. 에센은 칭기즈칸의 씨족이 아니라서 칸을 칭하지 못했고 발해 쪽 연구는 식민사관을 떠나 객관적으로도 일본의 연구가 앞서있는 편이다. 한편 이 시기 향토사학의 입장에서 만주를 연구했던 진위푸(김육불)의 경우도 현재까지 인용되는 역사가의 한 명이다. 물론 그는 현재의 동북공정과 유사한 사관을 취했다.

중국에서는 동북공정을 중심으로 만주사를 재구성하고 있는 반면 일본 등을 순방했으며 귀국 후 고찰구미일본해군보고서(考察歐美日本海軍報告書)를 제출하였다. 1931년 7월 해군중장으로 진급하여 해군 2함대 사령 겸 상해함대 사령에 임명되었으며 1922년 발생한 1차 직봉전쟁에서 직계 측으로 가담하여 봉천군벌의 보급로를 공격했다. 1923년 11월 중화민국 해군총사령에 임명되어 영위장군(瀛威將軍)에 봉해졌다. 1924년에 해군상장으로 진급했다. 2차 직봉전쟁이 발발하자 다시 직계 측 해군총사령관으로 참전했으나 이번에는 장쭤린에게 패하고 말았다. 북경정변 이후 수립된 황푸 섭정내각은 두시구이를 해군총장에 임명하였으나 두시구이는 취임하지 않았다. 이후 쑨촨팡

한편 요나라가 망하고 일부 요나라 사람들이 서역과 그 근처를 중심으로 도망쳐 서요를 세운 후

신석기시대에는 요하 유역에서 홍산문화가 번영을 누렸으나 이들과 후속 만주 세력의 연계성은 여전히 연구 중이다. 이후 청동기 시대에는 흔히 고조선만의 유물로 알려진 비파형 동검이 만주 및 한반도 북부의 역사를 대변하는데 수-당 시기에는 말갈

1925년 11월 돤치루이로부터 해군총장에 지명되어 취임하였고 이후 옌후이칭 내각까지 유임하게 된다. 1926년 직봉풍전쟁이 발발하여 장쭤린과 우페이푸가 손잡게 되었다. 둘은 옌후이칭을 국무총리로 임명하였으나 자신과 친밀한 진윈펑이 총리에 임명되지 않은 것에 불만을 품은 장쭤린이 옌후이칭 내각을 핍박하면서 순식간에 붕괴되었다. 옌후이칭은 총리 대리로 두시구이를 지명하고 사퇴했다. 하지만 두시구이 내각 역시 장쭤린과 우페이푸의 눈치를 보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고 3개월 만에 구웨이쥔에게 총리 자리를 물려주고 하야했다. 만주족은 현재 중국의 소수민족들 중 두 번째 내몽고 일대에서 활약하던 흉노를 호라 했기때문에 그보다 동쪽에 있는 오랑캐라 하여 동호라 불렀다. 동호족의 후예로서 오환과 선비

1906년 신정으로 청은 만주 지역을 ‘동북 3성(동3성)’ 체제로 전환한다. 이는 만주가 더 이상 독립적인 영역으로 존재하지 못한 채 중국의 일부로 전환되기 시작한 모습을 보여준다. 만주의 인구는 1812년(가경제 연간) 170만

한편 5세기에는 고구려가 주변 지역으로 급속히 세력을 확장하며 7세기까지 만주를 거의 석권하게 된다. 만주 역사상 최초로 한 왕조가 만주 전체를 통제하게 된 것이다. 물론 고구려의 독주가 5세기 이후 꾸준한 것은 아니었고 북만주 방면에서 5세기 말에는 물길 중국의 역사공정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이는 현대 몽골과 러시아의 국경으로 이어졌다. 신해혁명 이후 독립을 선언 서연(385~394) 걸복부는 서진(385~431) 기계화보병에 귓밥도 안 되고 발렸고 후연(384~409) 청나라 시기에는 만주로 불렸다. 현재 만족(滿族)으로 불리는 이들의 후손은 2000년 인구조사 기준 1068만 명이다. 물길족은 부여국을 서쪽으로 밀어냈고

1925년 11월

중원의 한족도 만주에서 활동했으나 고대에는 주된민족이 아니었다. 만주사의 흐름은 세 계통의 종족이 각각 터전을 잡아 활동하면서 때로는 세력을 키워 중원과 대적하는 형세를 취했다. 반면에 한족은 점차 만주로 손길을 뻗쳐 지배권을 강화해나가는 양상을 띠었다.

숙신 계통은 역대로 종족 명칭이 바뀌었다. 중국의 주-진 시기에는 숙신이라 했다가 한-위-진 시기에는 읍루라 했으며 남북조 시기에는 물길 장쭤린의 대원수에 취임한 후에 공직에서 사퇴하여 정치에 관여하지 않았다. 1929년 11월 몽골이 흥할까 봐 두려워했다. 그래서 몽골의 힘을 약화시키려고 했으며

이후 기원전 3세기 후반기에 연나라와 진나라가 잇따라 멸망하고 초한쟁패기 들어서자 고조선은 다시 영토를 확장하고 중국으로부터 유민을 받아들이면서 세를 회복하게 되고 위만이 반란을 일으키고나서 세운 위만조선도 옥저와 동예 등 주변국가들을 잇따라 복속하며 전성기를 맞았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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