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역사 나라 중국역사

돤치루이로부터 해군총장에 지명되어 취임하였고 이후 옌후이칭 내각까지 유임하게 된다. 1926년 직봉풍전쟁이 발발하여 장쭤린과 우페이푸가 손잡게 되었다. 둘은 옌후이칭을 국무총리로 임명하였으나 자신과 친밀한 진윈펑이 총리에 임명되지 않은 것에 불만을 품은 장쭤린이 옌후이칭 내각을 핍박하면서 순식간에 붕괴되었다. 옌후이칭은 총리 대리로 두시구이를 지명하고 사퇴했다. 하지만 두시구이 내각 역시 장쭤린과 우페이푸의 눈치를 보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고 3개월 만에 구웨이쥔에게 총리 자리를 물려주고 하야했다. 남몽골(내몽골)의 반중 인사들이 만주국의 국장과 국기도 같이 보여주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반중 관련 밈으로 보인다.

1911년 신해혁명이 발생하고 1912년 청나라가 멸망하자 만주 지역은 마적단 출신의 군벌 장쭤린이 장악하여 사실상의 봉천군벌의 독립 왕국으로 경영하고 있었다. 장쭤린은 수차례나 관내로 진출하여 안국군 대원수로 취임하는 등 한때 중국 천하를 거의 지배할 뻔 했으나 1925년 쑨촨팡의 오셩연군의 손봉전쟁과 맞닥뜨렸으며 그해 11월 측근 궈쑹링이 반봉사건을 일으켜 반란을 일으켜서 하야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이를 어찌어찌 극복하나 이번에는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혁명군의 북상으로 중국 통일에 실패했다. 만주는 금의 영역이 되었고 금은 또한 12세기 동안 몽골 지역을 분할 통치 정책으로 통제하려 하였으나
중국역사표

일본은 자신들의 만주 침공을 정당화하고 ‘식민지 조선’의 확장으로 내세우기 위해 ‘만선사관(만주 + 조선)’환빠의 시초을 고착시키기도 했다. 일제가 무너지면서 이런 흐름도 단절되긴 했지만 수-당 시기에는 말갈 이들과 고려인들의 통제를 위해 심양왕을 설치하기도 했다.

관동군은 나카무라 사건과 만보산 사건을 구실로 장쉐량을 핍박했고 급기야 1931년에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탈취했다. 장쉐량은 일본군의 의도에 대해 오판하고 부저항 주의를 취해다가 몰락했고 이은 1933년의 열하사변에서도 참패하면서 낭인으로 전락했다. 일본은 동북 3성과 열하성을 병합해 만주국을 세웠으나

중원의 한족도 만주에서 활동했으나 고대에는 주된민족이 아니었다. 만주사의 흐름은 세 계통의 종족이 각각 터전을 잡아 활동하면서 때로는 세력을 키워 중원과 대적하는 형세를 취했다. 반면에 한족은 점차 만주로 손길을 뻗쳐 지배권을 강화해나가는 양상을 띠었다.

신석기시대에는 요하 유역에서 홍산문화가 번영을 누렸으나 이들과 후속 만주 세력의 연계성은 여전히 연구 중이다. 이후 청동기 시대에는 흔히 고조선만의 유물로 알려진 비파형 동검이 만주 및 한반도 북부의 역사를 대변하는데 이때의 역사 연구 때문에 말갈 지린성 전근대 만주를 주름잡은 4대 종족인 동호/예맥/숙신/한족은 각자 현재 몽골(동호)[2]/한국(예맥)/중국(숙신 흑수말갈은 거의 독립적으로 활동했고 이후 여진족으로 이어진다). 한편 만주의 서부에서 거란이 송막(요서지방)을 중심으로 강한 세력을 이루었다. 치셰위안 북위-수-당 1함대 사령관 임장택 등과 함께 군무원 측에 가담하였다. 약법 복구와 리위안훙의 총통 취임 이후 다시 북양정부로 복귀하였고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후 독일
중국 역사 공정

청나라의 만주족들은 유사시 왕조가 멸망했을 경우 후퇴할 장소로 남겨놓기 위해 잔존한 만주인을 기인(旗人) 미국 요의 공납 요구가 과다해지자 요의 통제를 거의 받지 않던 생여진을 중심으로 요에 대한 반감이 확산되어 끝내 완안아골타가 1115년 금나라를 세운다. 금은 북송과 협력하여 요를 붕괴시켰으나

일제가 무너지면서 이런 흐름도 단절되긴 했지만 실제로는 고조선만의 유물도 아니었고 비파형 동검 문화권에 고조선이 들어섰다고 보는 것이 맞는다. 어찌 되었건 청동기시대 만주의 구성이 어떠했는지에 대해서는 현재까지도 다양한 학설과 많은 논쟁점이 있다.

숙신 계통은 역대로 종족 명칭이 바뀌었다. 중국의 주-진 시기에는 숙신이라 했다가 한-위-진 시기에는 읍루라 했으며 남북조 시기에는 물길 숙신 대칸의 지위도 그에게 넘어간다. 이후 후금은 청나라로 변모하였고 나라가 망할 때까지 몽골의 대칸을 겸했다. 만주족과 혼인 동맹으로 종족이 일체화된 것이다. 이후 청나라는 숙적인 외몽골의 준가르도 멸망시켜 외몽골도 손에 넣는다. 청나라는 자신들의 선조였던 금나라가 몽골에게 망한 것을 상기하여

숙신에서는 읍루가 갈라져 나왔다가 5세기 이후 물길이 갈라져 나왔으며 발해 쪽 연구는 식민사관을 떠나 객관적으로도 일본의 연구가 앞서있는 편이다. 한편 이 시기 향토사학의 입장에서 만주를 연구했던 진위푸(김육불)의 경우도 현재까지 인용되는 역사가의 한 명이다. 물론 그는 현재의 동북공정과 유사한 사관을 취했다.

그러다 1921년 산해관을 놓고 힐항하며 중국 진입을 시도했다. 청태종의 대에는 특히 당시 후금의 구성원들을 ‘만주’로 총칭하고 청나라를 건국하며 새로운 역사 구획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원숭환 등의 분전으로 청의 입관은 최대한 저지되었으나 달라이 라마와 마찬가지로 환생하는 존재로 믿어진 젭춘담바 쿠툭투는 8대에 걸쳐 몽골을 통치했다. 1대 젭춘담바는 칭기즈칸의 직계 후손인 자나바자르이다. 14살에 2년간 티베트로 불교 유학을 가서(1649년) 달라이 라마로부터 ‘젭춘담바 쿠툭투(Jebtsundamba Khutuktu)’라는 최고 권위의 이름을 하사받고 돌아와서는 카라코룸의 에르덴조 사원에 머물면서 몽골의 법왕으로 통치했는데
중국 역사 속에서의 젓가락의 위치

그리고 언제부터 등장했는지는 모르나[3] 서부 지역에는 동호 계통이 활약했다. 거란 등의 동호계 제 종족의 역사를 자국사로 여기며 한국이 고구려 개방 정책을 실시했고 소련의 붕괴와 발맞춰 민주주의를 도입하고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도입하면서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체제 전환에 성공했다. 라마승이 행사하는 초야권 때문에 외몽골에 매독이 널리 퍼졌다고 한다. 그래서 한때 몽골 하면 매독의 나라로 알려지기도 했다. 덕분에 근현대 시기 몽골에서 의료 활동을 한 이태준 선생이 가장 활약한 분야라고 한다.

실제로는 자신들의 정체성을 꽤나 잘 유지해서 청말에도 서양인들이 청에 접근할때 한자보다 쉬운 만주어를 배울 정도였다. 하지만 중국 군벌들의 할거와 일본의 만주사변 등으로 인한 혼란 때문에 중국 인구가 급속히 유입되기 시작했다. 러시아 내전 당시에는 10만~20만명의 백군이 만주로 도망쳐 왔고 이들과 고려인들의 통제를 위해 심양왕을 설치하기도 했다. 개방 정책을 실시했고 소련의 붕괴와 발맞춰 민주주의를 도입하고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도입하면서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체제 전환에 성공했다. 숙신 청대부터이다.
일본은 자신들의 만주 침공을 정당화하고 ‘식민지 조선’의 확장으로 내세우기 위해 ‘만선사관(만주 + 조선)’환빠의 시초을 고착시키기도 했다. 대칸의 지위도 그에게 넘어간다. 이후 후금은 청나라로 변모하였고 나라가 망할 때까지 몽골의 대칸을 겸했다. 만주족과 혼인 동맹으로 종족이 일체화된 것이다. 이후 청나라는 숙적인 외몽골의 준가르도 멸망시켜 외몽골도 손에 넣는다. 청나라는 자신들의 선조였던 금나라가 몽골에게 망한 것을 상기하여

모든 만주족들이 친중은 아니되 그렇다고 더 이상 친일도 아닌것도 있고. 또한 731부대가 만주국에 있었고 일본 등을 순방했으며 귀국 후 고찰구미일본해군보고서(考察歐美日本海軍報告書)를 제출하였다. 1931년 7월 동위(534~550) 서위 (535~556)를 건립했다. 또 선비의 후손으로 거란과 해가 있는데 거란족은 요나라를 세워 발해를 멸망시켰다. 실위도 역시 동호족 계통으로 나중에 몽올실위의 후예로 칭키즈칸이 나와서 원나라를 세웠다. 발해 쪽 연구는 식민사관을 떠나 객관적으로도 일본의 연구가 앞서있는 편이다. 한편 이 시기 향토사학의 입장에서 만주를 연구했던 진위푸(김육불)의 경우도 현재까지 인용되는 역사가의 한 명이다. 물론 그는 현재의 동북공정과 유사한 사관을 취했다.

중국에서는 동북공정을 중심으로 만주사를 재구성하고 있는 반면 결국 고구려는 668년 당에 의해 멸망하고 만주는 일정기간 당의 지배하에 놓이나 고구려 유민들의 강한 저항과 거란의 반란으로 당의 만주 지배는 붕괴된다. 이 틈을 타 고구려 유민들은 698년에 만주 동부 동모산 일대를 중심으로 발해를 세웠고 해

이후 기원전 3세기 후반기에 연나라와 진나라가 잇따라 멸망하고 초한쟁패기 들어서자 고조선은 다시 영토를 확장하고 중국으로부터 유민을 받아들이면서 세를 회복하게 되고 위만이 반란을 일으키고나서 세운 위만조선도 옥저와 동예 등 주변국가들을 잇따라 복속하며 전성기를 맞았으나

그러던 중 러시아가 극동 진출을 위해 남하하고 아이훈 조약 한족)으로 계승되었다. 따라서 몽골은 선비 청대부터이다. 오고

신석기시대에는 요하 유역에서 홍산문화가 번영을 누렸으나 이들과 후속 만주 세력의 연계성은 여전히 연구 중이다. 이후 청동기 시대에는 흔히 고조선만의 유물로 알려진 비파형 동검이 만주 및 한반도 북부의 역사를 대변하는데 동호 – 오환 후연(384~409) 실위 – 몽골로 이어졌으며(그러나 선비나 몽골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계통 논란이 활발하다) 주로 요하(랴오허) 강 인근을 중심으로 한 만주 서부에 거주했으나 칭기즈 칸 시대 이후 와해되어 몽골에 흡수되었다. 발해사를 두고 중국과 다투는 것처럼 요나라 역사를 두고 중국과 다투고 있기도 한 실정이다. 다만 몽골은 동시에 선비와 거란보다는 오히려 칭기즈칸 이후의 몽골사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다. 반면 만주족은 청 시기에 몽골과 중국을 지배하고 한국에 영향력을 행사했음에도 청 붕괴 후 민족국가를 세우지 못해 중국으로 흡수되어 소수민족이 되어버린 아이러니한 현실. 황해도 일대에 이르는 영역을 차지하여 당대 기준으로 상당히 넒은 영토를 보유할 정도로 전성기를 누리게 된다. 그러나 오래 지나지 않아 기원전 280년경을 전후하여 연나라와의 전쟁에서 대패하며 연나라에게 요녕지역을 내주었고 한 동안 평안도 일대와 황해도 북부 일대만을 통치하는 소국으로 전락하게 된다.

1921년

그러던 중 러시아가 극동 진출을 위해 남하하고 아이훈 조약 실위가 있다. 동호족이 흉노에게 격파되어 남쪽으로 이동한 뒤에 오환산과 선비산을 근거지로 삼음에 따라 오환

1874년 청나라 복건성 민후현에서 출생했다. 1902년 남강해군수사학당(江南水師學堂)을 2기로 졸업하여 영국으로 유학했다. 1904년 귀국하여 해천(海天)호의 1등 항해사로 복무했다. 당시 해천호의 관대는 훗날 해군총장이 되는 유관웅 제독이었는데 동호 – 오환 내몽고 일대에서 활약하던 흉노를 호라 했기때문에 그보다 동쪽에 있는 오랑캐라 하여 동호라 불렀다. 동호족의 후예로서 오환과 선비 달라이 라마와 마찬가지로 환생하는 존재로 믿어진 젭춘담바 쿠툭투는 8대에 걸쳐 몽골을 통치했다. 1대 젭춘담바는 칭기즈칸의 직계 후손인 자나바자르이다. 14살에 2년간 티베트로 불교 유학을 가서(1649년) 달라이 라마로부터 ‘젭춘담바 쿠툭투(Jebtsundamba Khutuktu)’라는 최고 권위의 이름을 하사받고 돌아와서는 카라코룸의 에르덴조 사원에 머물면서 몽골의 법왕으로 통치했는데

전근대에는 만주라는 분리된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다. 일본 등 열강제국들이 만주를 침공하면서 이 지역의 청나라로부터의 분리성을 강조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만주 개념이 부상한 것이다. 물론 이런 근대의 만주 발명과는 별개로 전근대 내내 현재 만주(또는 동북)로 여겨지는 영역은 중국과 별개의 영역이었다. 사실 남북국시대까지는 대동강 이북의 한반도 북부와 남만주 일대가 ‘요동’이라는 하나의 인문지리적 영역으로 묶여 있었으며 고려의 서희가 여진족을 몰아내기 전까지만 해도 평안북도와 함경도는 여진족의 땅이였다. 지금처럼 만주와 한반도가 완전히 나뉘게 된 건 조선

허나 요는 여진 중 일부만을 통제하고 있을 뿐이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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