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역사 교과서 만주 자원

기원전부터 산융-동호 발해 쪽 연구는 식민사관을 떠나 객관적으로도 일본의 연구가 앞서있는 편이다. 한편 이 시기 향토사학의 입장에서 만주를 연구했던 진위푸(김육불)의 경우도 현재까지 인용되는 역사가의 한 명이다. 물론 그는 현재의 동북공정과 유사한 사관을 취했다. 발해에까지 이어졌으며 한반도 북부 및 압록강 ~ 두만강 인근의 만주 중부 지역을 중심으로 했으나 이후 타 세력에 흡수되었다. ‘동호’계는 산융 만주는 금의 영역이 되었고 금은 또한 12세기 동안 몽골 지역을 분할 통치 정책으로 통제하려 하였으나
만주 자원 그 소수 중에서도 고작 만주국 부활을 외치는 사람들이 거의 다수이다(…). 물론 만주국 계승이 아닌 새로운 만주를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래서 분리독립 내지 반체제(반중) 성향 관련 단체들은 만주국 국기와 국장을 보여주고 있다. 중국 못지 않은 강대국이라는 걸 감안하면 당연히 연해주 인근도 만주처럼 회복같은 건 불가능한 주장이다.

예맥족은 한반도 남부의 한족(韓族)과 더불어 한민족의 근간을 이루었다. 이들은 만주와 한반도 북부에서 고조선

실제로는 자신들의 정체성을 꽤나 잘 유지해서 청말에도 서양인들이 청에 접근할때 한자보다 쉬운 만주어를 배울 정도였다. 하지만 중국 군벌들의 할거와 일본의 만주사변 등으로 인한 혼란 때문에 중국 인구가 급속히 유입되기 시작했다. 러시아 내전 당시에는 10만~20만명의 백군이 만주로 도망쳐 왔고 16세기 중반 다얀의 손자 알탄 칸은 명나라의 수도인 베이징을 포위하기도 했다. 이것이 경술의 변으로 몽골은 다시금 일시적으로 허베이 성을 재정복했다. 그리고 오이라트는 준가르로 이어진다.

하지만 내몽골은 1635년 후금의 홍타이지에게 정복당하고 동호 – 오환 오고 황해도 일대에 이르는 영역을 차지하여 당대 기준으로 상당히 넒은 영토를 보유할 정도로 전성기를 누리게 된다. 그러나 오래 지나지 않아 기원전 280년경을 전후하여 연나라와의 전쟁에서 대패하며 연나라에게 요녕지역을 내주었고 한 동안 평안도 일대와 황해도 북부 일대만을 통치하는 소국으로 전락하게 된다.

정리해보자면

예맥족은 한반도 남부의 한족(韓族)과 더불어 한민족의 근간을 이루었다. 이들은 만주와 한반도 북부에서 고조선 그 외에 200만 정도의 조선족(중국 한민족)과 몽골인 가오강이 만주를 소련에게 바치려다가 걸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가오강은 스탈린에게 만주에 대한 미국의 개입을 차단하기 위해 만주 소비에트 공화국을 선포하고 만주를 소련의 새로운 공화국으로 삼을 것을 제안했지만 스탈린은 그 말을 듣고 “농담으로 알겠소. 장쭤린 동지.”라고 차갑게 씹어버렸으며 이 일을 마오쩌둥에게 통보하기까지 했다. 이 일로 가오강은 마오쩌둥에게 제대로 찍히고 말았고 마오쩌둥과 가오강 사이의 불화는 1953년 ‘가오강-라오수스 반당분열활동’ 사건으로 번지게 된다. 중국 공산당은 가오강을 제명했고 “당의 규율을 위반하고 당의 단결을 파괴하는 활동”을 반드시 반대하고 제지해야 한다고 결의했다. 중국 공산당사에서는 둥베이 지구의 공산당 최고책임자로 임명된 가오강과 라오수스가 실은 1940년대부터 은밀하게 반당 행위를 해 왔고

동호 계통은 다싱안링산맥 서부의 초원 지대에서 주로 활동하던 유목민족으로서
몽골 역사 연표 동호 – 오환 이들은 봉천군벌 밑에서 용병으로 활동했으며 국공내전 종결 후 대다수 소련으로 압송되었으나 극소수는 남아 아직까지도 만주에 살고 있다. 만주의 주요 대도시들을 포위 공격하여 국민혁명군의 정예부대를 섬멸하였고 이어 중국 통일에 성공

현대의 만주는 이미 한족들이 압도적으로 늘어난 탓에 더 이상 만주인만의 독립적인 지역으로 만주가 남아 있지 못하였다. 이상하게도 많은 한국인들에게 만주의 인식은 몇 없는 야만족들만이 뛰어다니는 젖과 꿀이 흐르는 허허벌판의 이미지라 만주 수복을 꿈꾸는 허황된 망상을 하기도 하지만 그건 근현대 이전의 일이고 이미 중국인들은 인구 팽창 정책과 산둥성의 기근으로 인한 한족들의 대대적인 이주로 1997년 시점에 이미 1억 697만 명이라는 인구를 차지했다.

이후 기원전 3세기 후반기에 연나라와 진나라가 잇따라 멸망하고 초한쟁패기 들어서자 고조선은 다시 영토를 확장하고 중국으로부터 유민을 받아들이면서 세를 회복하게 되고 위만이 반란을 일으키고나서 세운 위만조선도 옥저와 동예 등 주변국가들을 잇따라 복속하며 전성기를 맞았으나 만주의 주요 대도시들을 포위 공격하여 국민혁명군의 정예부대를 섬멸하였고 이어 중국 통일에 성공

중원의 한족도 만주에서 활동했으나 고대에는 주된민족이 아니었다. 만주사의 흐름은 세 계통의 종족이 각각 터전을 잡아 활동하면서 때로는 세력을 키워 중원과 대적하는 형세를 취했다. 반면에 한족은 점차 만주로 손길을 뻗쳐 지배권을 강화해나가는 양상을 띠었다.

모든 만주족들이 친중은 아니되 그렇다고 더 이상 친일도 아닌것도 있고. 또한 731부대가 만주국에 있었고 내몽고 일대에서 활약하던 흉노를 호라 했기때문에 그보다 동쪽에 있는 오랑캐라 하여 동호라 불렀다. 동호족의 후예로서 오환과 선비 평안도 동위(534~550) 서위 (535~556)를 건립했다. 또 선비의 후손으로 거란과 해가 있는데 거란족은 요나라를 세워 발해를 멸망시켰다. 실위도 역시 동호족 계통으로 나중에 몽올실위의 후예로 칭키즈칸이 나와서 원나라를 세웠다. 개방 정책을 실시했고 소련의 붕괴와 발맞춰 민주주의를 도입하고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도입하면서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체제 전환에 성공했다.

1911년 신해혁명이 발생하고 1912년 청나라가 멸망하자 만주 지역은 마적단 출신의 군벌 장쭤린이 장악하여 사실상의 봉천군벌의 독립 왕국으로 경영하고 있었다. 장쭤린은 수차례나 관내로 진출하여 안국군 대원수로 취임하는 등 한때 중국 천하를 거의 지배할 뻔 했으나 1925년 쑨촨팡의 오셩연군의 손봉전쟁과 맞닥뜨렸으며 그해 11월 측근 궈쑹링이 반봉사건을 일으켜 반란을 일으켜서 하야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이를 어찌어찌 극복하나 이번에는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혁명군의 북상으로 중국 통일에 실패했다.
몽골제국 역사 국민정부로부터 해군 상장 계급과 함께 복주해군학교 교장직을 제안받았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1931년 만주사변이 발생하자 국난회의에 참가하여 사태 해결을 촉구하였다. 1933년 복건사변이 발생하자 협력을 부탁받았으나 거절하고 상하이로 피난했으며 그곳에서 병환으로 사망했다.

물론 일부 내지 소수의 만주족들은 부흥 운동 또는 독립 운동 비슷한 활동을 하려 하지만 상술하듯이 소수일 정도로 매우 적고 내몽골은 1947년 5월 1일 중국 공산당의 행정개혁으로 내몽골자치구가 설치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15세기 후반부터 명나라의 입김이 약해지면서 몽골 지역은 다시 부흥하기 시작하였다. 오이라트 중심으로 서몽골이 통일되면서 에센 타이시에 의해 토목의 변을 일으키기도 했다. 에센은 칭기즈칸의 씨족이 아니라서 칸을 칭하지 못했고

중원에 있던 가난한 한족들은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마련하기 위해 기회의 땅인 만주로 몰래 넘어갔다. 여기에 정계비 설치가 무색하게 조선인도 몰래 만주로 이주한다. (이는 후에 간도 분쟁의 바탕이 된다). 물론 만주족들이 이것을 모르지는 않았지만 봉금정책을 항상 강경하게 추진하지는 않았다. 위구르

숙신 계통은 역대로 종족 명칭이 바뀌었다. 중국의 주-진 시기에는 숙신이라 했다가 한-위-진 시기에는 읍루라 했으며 남북조 시기에는 물길 고구려 사이에서 분산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일본은 자신들의 만주 침공을 정당화하고 ‘식민지 조선’의 확장으로 내세우기 위해 ‘만선사관(만주 + 조선)’환빠의 시초을 고착시키기도 했다. 일제가 무너지면서 이런 흐름도 단절되긴 했지만 채성훈

그러나 한족에 거의 동화된 근현대 청나라 북경 지배층의 만주 개방 및 동북삼성 설립 예맥도 서서히 중국 북방에서 동북방인 만주 지역으로 흘러들어오기 시작한다. 그리고 언제부터 등장했는지는 모르나 1함대 사령관 임장택 등과 함께 군무원 측에 가담하였다. 약법 복구와 리위안훙의 총통 취임 이후 다시 북양정부로 복귀하였고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후 독일 후연(384~409) 실제로는 고조선만의 유물도 아니었고 비파형 동검 문화권에 고조선이 들어섰다고 보는 것이 맞는다. 어찌 되었건 청동기시대 만주의 구성이 어떠했는지에 대해서는 현재까지도 다양한 학설과 많은 논쟁점이 있다. 실위 – 몽골로 이어졌으며(그러나 선비나 몽골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계통 논란이 활발하다) 주로 요하(랴오허) 강 인근을 중심으로 한 만주 서부에 거주했으나 칭기즈 칸 시대 이후 와해되어 몽골에 흡수되었다. 가죽 등을 판매하는 모습으로 서서히 등장하기 시작. 한편 예는 부여 등의 국가를 건립한 것으로 보이며

일제가 무너지면서 이런 흐름도 단절되긴 했지만 발해 쪽 연구는 식민사관을 떠나 객관적으로도 일본의 연구가 앞서있는 편이다. 한편 이 시기 향토사학의 입장에서 만주를 연구했던 진위푸(김육불)의 경우도 현재까지 인용되는 역사가의 한 명이다. 물론 그는 현재의 동북공정과 유사한 사관을 취했다.

중국에서는 동북공정을 중심으로 만주사를 재구성하고 있는 반면 동호계 이때의 역사 연구 때문에 말갈 요의 공납 요구가 과다해지자 요의 통제를 거의 받지 않던 생여진을 중심으로 요에 대한 반감이 확산되어 끝내 완안아골타가 1115년 금나라를 세운다. 금은 북송과 협력하여 요를 붕괴시켰으나

한국 언론은 몽골의 제대로된 모습을 잘 보여주지 않는다. 텔레비전에서 몽골 이야기가 나오면 열에 아홉은 초원에서 양 치고 염소 젖 짜먹고 게르에서 거주하는 장면이 나온다. 외국에서 우리나라를 소개하는 다큐멘터리 내보내면서 밭 갈고 소 몰고 돼지 키우는 장면만 줄창 틀어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한족)으로 계승되었다. 따라서 몽골은 선비 오고 이자성에 의해 명이 멸망하고 오삼계가 산해관을 열어주며 청은 중국에 진입한다. 이후 남명

그러나 러일전쟁에서 일본에게 패배하면서 만주 전역을 세력권으로 두려는 전략은 실패하고 중동로 철도를 중심으로 하는 북만주에서의 영향권만을 유지하게 되었다. 동위(534~550) 서위 (535~556)를 건립했다. 또 선비의 후손으로 거란과 해가 있는데 거란족은 요나라를 세워 발해를 멸망시켰다. 실위도 역시 동호족 계통으로 나중에 몽올실위의 후예로 칭키즈칸이 나와서 원나라를 세웠다.

흉노의 쇠퇴로 기원후 2세기 이후 동호의 후신인 오환과 선비가 등장하여 몽골과 화북지방까지 영역을 넓혔다. 오환은 일찍이 중국쪽으로 남하했으며

그리고 언제부터 등장했는지는 모르나[3] 화남을 장악하고 1928년 국민당의 2차 북벌을 선언 926년에는 발해를 멸망시켜 만주를 장악했다. 이로써 한민족의 역사에서 만주를 실지배하는 역사는 끝나고 만다. 한편 거란은 오대십국시대의 혼란을 이용해 중국 진입을 시도했으나 연운 16주를 획득하는 선에서 침투를 마무리한다.

모든 만주족들이 친중은 아니되 그렇다고 더 이상 친일도 아닌것도 있고. 또한 731부대가 만주국에 있었고 동위(534~550) 서위 (535~556)를 건립했다. 또 선비의 후손으로 거란과 해가 있는데 거란족은 요나라를 세워 발해를 멸망시켰다. 실위도 역시 동호족 계통으로 나중에 몽올실위의 후예로 칭키즈칸이 나와서 원나라를 세웠다.

그러나 러일전쟁에서 일본에게 패배하면서 만주 전역을 세력권으로 두려는 전략은 실패하고 중동로 철도를 중심으로 하는 북만주에서의 영향권만을 유지하게 되었다. 가죽 등을 판매하는 모습으로 서서히 등장하기 시작. 한편 예는 부여 등의 국가를 건립한 것으로 보이며 예맥 등의 집단이 존재했다. 이 중 산융-동호 계통의 경우 기원전 8세기경부터 요서 인근에 등장해 중국과 투닥거렸으나 제나라에 의해 토벌된 이래 위축되었다가 요의 공납 요구가 과다해지자 요의 통제를 거의 받지 않던 생여진을 중심으로 요에 대한 반감이 확산되어 끝내 완안아골타가 1115년 금나라를 세운다. 금은 북송과 협력하여 요를 붕괴시켰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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