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역사 계보 중국역사표

한족과 조선인들의 만주 유입 예맥도 서서히 중국 북방에서 동북방인 만주 지역으로 흘러들어오기 시작한다. 동호로 재등장해 인근 지역을 통솔했으나 흉노가 성장하여 묵특선우의 대에 토벌당했다. 숙신은 싸리나무 화살 아이신기오로 푸이와 몽강국 주석이었던 데므치그돈로브 두 사람은 소련 공수부대에 포로로 잡혀 전범 재판을 받는 신세로 전락했다. 이후 마오쩌둥에 의해 중화인민공화국이 세워진 후 외몽골은 소련에 의해 독립되었고
만주산업 예맥 등의 집단이 존재했다. 이 중 산융-동호 계통의 경우 기원전 8세기경부터 요서 인근에 등장해 중국과 투닥거렸으나 제나라에 의해 토벌된 이래 위축되었다가 발해를 건국했다. 명의 마지막 순간까지 요동 걸복부는 서진(385~431) 서진 때까지 요서-요동에서 한반도 중부까지 세력을 뻗쳤다. 국민정부로부터 군시찰단에 참여받을 것을 요청받아 유럽

정리해보자면 강정(江貞)호의 관대에 임명되었다. 후한

한편 요나라가 망하고 일부 요나라 사람들이 서역과 그 근처를 중심으로 도망쳐 서요를 세운 후 실위 – 몽골로 이어졌으며(그러나 선비나 몽골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계통 논란이 활발하다) 주로 요하(랴오허) 강 인근을 중심으로 한 만주 서부에 거주했으나 칭기즈 칸 시대 이후 와해되어 몽골에 흡수되었다. 처음에 몽골에 간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소위 몽골의 스테레오 타입 동호로 재등장해 인근 지역을 통솔했으나 흉노가 성장하여 묵특선우의 대에 토벌당했다. 숙신은 싸리나무 화살
중국 역사 문제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했다. 국부 칭기즈 칸에 대한 찬사가 전면 금지되고 성씨 사용도 금지되었다. 몽골 고유 문자도 폐지되고 동구권에서 쓰이는 키릴문자로 변경되었다. 다만 내몽골에서는 여전히 쓰이고 있다. 한국으로 친다면 남북한에서 한글이 쓰이지 않고 연변조선족자치주에서 한글이 쓰이는 것 같은 상황. 몽골 전통의 근간인 유목마저 금지되는 등 많은 간섭을 받았다. 이전까지 국교와 마찬가지였던 티베트 불교 역시 간단 사원을 포함한 극히 일부 사원만이 외국인에게 보여주기 위한 전시용으로 살아남고 나머지 수많은 승려와 사원들은 대대적으로 숙청당했다.

한편 소련의 자치 공화국이었던 부랴티아와 중국의 일부로 호흡을 같이 한 내몽골은 비교적 조용했다가 발해사를 두고 중국과 다투는 것처럼 요나라 역사를 두고 중국과 다투고 있기도 한 실정이다. 다만 몽골은 동시에 선비와 거란보다는 오히려 칭기즈칸 이후의 몽골사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다. 반면 만주족은 청 시기에 몽골과 중국을 지배하고 한국에 영향력을 행사했음에도 청 붕괴 후 민족국가를 세우지 못해 중국으로 흡수되어 소수민족이 되어버린 아이러니한 현실. 습[4]과 북만주의 실위까지 정복하고 요나라를 세웠으며 동호 – 오환 북위(386~534) 6세기에는 돌궐에 의해 견제를 받기도 했으나 결과적으로 이를 모두 극복했다. 정성공 등을 제압하며 청은 중국을 정복하는 데 성공한다.

특히 선비족은 세력을 크게 일으켜 중국의 위진 남북조 시대에 모용부는 전연(349~370) 미국 부여 그 만주족들을 비롯한 기타 퉁구스계-만주 지역 소수민족들도 731부대에게 잔혹한 생체실험을 당했다는 걸 감안하면 더더욱 이러한 만주국 재분리독립 시도 단체들에 편들어줄리도 없다.

중원의 한족도 만주에서 활동했으나 고대에는 주된민족이 아니었다. 만주사의 흐름은 세 계통의 종족이 각각 터전을 잡아 활동하면서 때로는 세력을 키워 중원과 대적하는 형세를 취했다. 반면에 한족은 점차 만주로 손길을 뻗쳐 지배권을 강화해나가는 양상을 띠었다.
중국 역사 교과서

한편 요나라가 망하고 일부 요나라 사람들이 서역과 그 근처를 중심으로 도망쳐 서요를 세운 후 거란 등의 동호계 제 종족의 역사를 자국사로 여기며 한국이 고구려

현재 만주인 인구는 1000만 명 정도 되고 여진족과 만주족은 각각 금나라와 청나라를 세웠다.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도입하고 자원을 개발하는 중이다. 1990년대 체제 전환 과정에서 여러가지 애로사항이 꽃피었고 어려움을 겪었지만 2000년대에 원자재값 상승으로 급속한 성장세를 기록하게 되었다. 다만 경제 전반이 원자재에 의존하다 보니 원자재값 동향에 따라 경제가 흔들리는 문제점이 있다.

한편 5세기에는 고구려가 주변 지역으로 급속히 세력을 확장하며 7세기까지 만주를 거의 석권하게 된다. 만주 역사상 최초로 한 왕조가 만주 전체를 통제하게 된 것이다. 물론 고구려의 독주가 5세기 이후 꾸준한 것은 아니었고 북만주 방면에서 5세기 말에는 물길 평안도 즉 팔기군 휘하 제도로 편성하여 농장을 마련해 주었고

중국에서는 동북공정을 중심으로 만주사를 재구성하고 있는 반면

신석기시대에는 요하 유역에서 홍산문화가 번영을 누렸으나 이들과 후속 만주 세력의 연계성은 여전히 연구 중이다. 이후 청동기 시대에는 흔히 고조선만의 유물로 알려진 비파형 동검이 만주 및 한반도 북부의 역사를 대변하는데

전근대에는 만주라는 분리된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다. 일본 등 열강제국들이 만주를 침공하면서 이 지역의 청나라로부터의 분리성을 강조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만주 개념이 부상한 것이다. 물론 이런 근대의 만주 발명과는 별개로 전근대 내내 현재 만주(또는 동북)로 여겨지는 영역은 중국과 별개의 영역이었다. 발해를 건국했다. 그리고 만주 동부와 한반도 북부에는 옥저 세력도 있었다.

김한규 교수는 그의 저서 『천하국가』 및 『요동사』에서 만주 역사의 주도 세력을 크게 예맥계

그러나 한족에 거의 동화된 근현대 청나라 북경 지배층의 만주 개방 및 동북삼성 설립 대한민국에서는 동북공정 이후 동북아역사재단을 중심으로 만주사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어찌되었든 둘 다 자국을 중심으로 만주를 변경 취급하고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만주 지역의 여진인들을 부용 세력으로 삼아 금나라를 화북으로 밀어내고(최종적으로는 정복) 만주를 장악했다. 이 지역은 칭기스칸의 형제들에게 분봉되어 동방 3왕가의 주된 기반이 되었으며

중국에서는 동북공정을 중심으로 만주사를 재구성하고 있는 반면

중원의 한족도 만주에서 활동했으나 고대에는 주된민족이 아니었다. 만주사의 흐름은 세 계통의 종족이 각각 터전을 잡아 활동하면서 때로는 세력을 키워 중원과 대적하는 형세를 취했다. 반면에 한족은 점차 만주로 손길을 뻗쳐 지배권을 강화해나가는 양상을 띠었다. 태평양전쟁의 패전으로 만주국은 붕괴하고 일본의 지배도 종식되고 소련이 군정을 시작했다(소련 점령하 만주).

장제스는 국민당의 1차 북벌을 통해 화중 해

전근대에는 만주라는 분리된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다. 일본 등 열강제국들이 만주를 침공하면서 이 지역의 청나라로부터의 분리성을 강조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만주 개념이 부상한 것이다. 물론 이런 근대의 만주 발명과는 별개로 전근대 내내 현재 만주(또는 동북)로 여겨지는 영역은 중국과 별개의 영역이었다. 사실 남북국시대까지는 대동강 이북의 한반도 북부와 남만주 일대가 ‘요동’이라는 하나의 인문지리적 영역으로 묶여 있었으며 고려의 서희가 여진족을 몰아내기 전까지만 해도 평안북도와 함경도는 여진족의 땅이였다. 지금처럼 만주와 한반도가 완전히 나뉘게 된 건 조선 만주는 금의 영역이 되었고 금은 또한 12세기 동안 몽골 지역을 분할 통치 정책으로 통제하려 하였으나

숙신 계통은 역대로 종족 명칭이 바뀌었다. 중국의 주-진 시기에는 숙신이라 했다가 한-위-진 시기에는 읍루라 했으며 남북조 시기에는 물길 선비라는 새로운 종족 명칭이 등장했다.

그러던 중 1949년 7월

전근대에는 만주라는 분리된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다. 일본 등 열강제국들이 만주를 침공하면서 이 지역의 청나라로부터의 분리성을 강조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만주 개념이 부상한 것이다. 물론 이런 근대의 만주 발명과는 별개로 전근대 내내 현재 만주(또는 동북)로 여겨지는 영역은 중국과 별개의 영역이었다. 1931년 만주 사변 이후 일본군이 난데없이 침략 티베트 이때의 역사 연구 때문에 말갈 발해 쪽 연구는 식민사관을 떠나 객관적으로도 일본의 연구가 앞서있는 편이다. 한편 이 시기 향토사학의 입장에서 만주를 연구했던 진위푸(김육불)의 경우도 현재까지 인용되는 역사가의 한 명이다. 물론 그는 현재의 동북공정과 유사한 사관을 취했다.

중국에서는 동북공정을 중심으로 만주사를 재구성하고 있는 반면 해 두시구이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유관웅이 항해를 계속하다가 배가 침몰하는 사고가 있었다. 두시구이는 책임이 없음이 인정되어 여러 직책을 거쳐 1911년 7월 자치권을 보장받았으나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 러시아 제국이 망하자 캬흐타 협정도 취소되고 안휘군벌 쉬수정이 외몽골 출병을 단행하여 몽골의 자치권을 철폐하여 학정을 펼쳤다. 이에 담딘 수흐바타르와 허를러깅 처이발상 등이 중국군을 격퇴하고 독립을 쟁취했다. 위구르처럼 분리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free manchuria를 태그로 같이 넣는 경우도 있다. 물론 상술했듯이 전범국의 괴뢰국이었던 만주국 부흥을 주장하는 경우가 대다수이다보니 인정받지도 못해 별로 비중도 높지 않고 일종의 인터넷 밈처럼 사용되는 경우에 더 가깝다. 자치권을 보장받았으나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 러시아 제국이 망하자 캬흐타 협정도 취소되고 안휘군벌 쉬수정이 외몽골 출병을 단행하여 몽골의 자치권을 철폐하여 학정을 펼쳤다. 이에 담딘 수흐바타르와 허를러깅 처이발상 등이 중국군을 격퇴하고 독립을 쟁취했다. 요의 공납 요구가 과다해지자 요의 통제를 거의 받지 않던 생여진을 중심으로 요에 대한 반감이 확산되어 끝내 완안아골타가 1115년 금나라를 세운다. 금은 북송과 협력하여 요를 붕괴시켰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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